종말과 믿음(8):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3:14-19



일곱 교회 가운데 드디어 마지막 교회를 살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 씁쓸하게 칭찬만으로 마무리 되지 않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것을 보며 가장 먼저 성도들은 우리의 마지막이 주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마무리 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는 모습을 15절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이 질책하는 것은 주님 앞에 보인 그들의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것은 어느 쪽이든지 사실 좋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태가 차갑든지 아니면 뜨거운 상태 둘 다 좋다는 그런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는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이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석회수를 포함한 미지근한 물이 근처 샘에서 흘렀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이 물을 마실 때 구토가 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강조점은 뜨겁고 차가운 신앙생활 중 하나를 고르라는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석회수가 섞인 미지근한 물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듯(16: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그런 신앙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상태는 주의 영광을 위해 드림과 헌신이 안 일어나고 있는 영적 상태입니다. 우선적으로 기도의 삶에 여러분을 드립니까? 성경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가려는 봄부림은 있는지요? 내 삶의 칭찬을 전적으로 주님께 드리십니까?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의 일에 늘 열심을 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주님께 더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새 학기가 다가 옵니다. 성도님들의 영적 각오는 무엇입니까? 그냥 해오던 대로 가는 것입니까?

 

무엇을 개선하고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나의 신앙을 주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옮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바꾸는 태도가 성도의 자세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가정과 나를 변화 시켜야 합니다.

 

변화가 없고 열정이 없을 때 신앙은 미지근해집니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사람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구체적으로 17절에서 지적하십니다.

 

성경에 부족함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족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삶 때문에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의 눈으로 살면 겸손해집니다.

 

우리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을 성심껏 돕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에서 그들이 도운 일을 언급하고 은근히 자신을 높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분들이 더 훨씬 많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엄청나 보이는데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이 세상을 바꿀만한 수준도 안됩니다. 고작 한 두 사람 도울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서 너 사람을 도운 사람은 세상에 더 많은 사람을 돕지 못하는 나의 가난함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더 밝아져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름 없이 봉사하고 섬기는 분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어두운 눈이 밝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비판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위의 한 두 사람에게 전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즐거움을 맛보신 분들은 평생 그 일에 전념하는 선교사님들과 목회자들을 더 격려하고 지치지 않도록 함께 협력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17절에서 말씀 하시는 부족한 것 중에 하반 부분을 보면 벌거벗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로부터 당할 수 있는 수치를 뜻합니다. 없을 수도 있지만 주님의 눈에는 많았다는 것이 우리신앙인들에게 경고로 들려 집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의 손에 계속해서 다듬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9절에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해 주님은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기 위해서입니다.

 

12: 6-11“6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1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래서 주님은 본문18절에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불로 연단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만이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불로 연단하는 이유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순수한 금일수록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아야 합니다. 연단의 불이 더 뜨거울수록 사실 우리의 허물과 죄는 사라지고 주님 앞에 더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시간이 가면서 더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가십니까? 주님이 허락하시는 의의 흰옷을 입기에 부족하지 않는 삶으로 성숙되어 가고 있는지요? 이것은 내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비판이 더 많아지고, 수용과 이해보다 비교와 판단이 더 많아지고 있는지요? 이것이 있다면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덮어야 할 영역들입니다. 또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과 알아야 할 영역들이 엄청나게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내 생각이나 사람의 가르침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진짜 인도함을 받아야 할 것은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싸우는 것은 사람들의 주장과 이론들을 가지고 서로 적이 되어 싸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짜 따라가야 할 분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열심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신앙생활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처럼 열심을 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열심 가운데 있으면서 수치와 허물이 있다면 회개하게 하십니다(19). 이런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라오디게아 근처 미지근한 우물에 관한 것은 마이클 윌코크, 요한계시록.  p. 64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