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믿음(7): 힘든 상황에도 원망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3:7-13



살아가면서 칭찬만 듣는 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일곱 교회를 살펴오면서 실제로 책망이 없이 칭찬만 듣는 교회가 두 곳이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핀 서머나 교회와 오늘 보게 될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피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칭찬 받는 교회에 대해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8절에 있습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라는 말입니다. 칭찬만 듣는 교회는 엄청날 줄 알았는데 일단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놀라운 것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부족하고 약해 보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의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 주님의 칭찬 대상이 아니라는 믿음이 우선 필요 합니다.

 

가졌는가 못 가졌는가, 높은가 낮은가? 이런 것들이 주님의 마음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짜 관심은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 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나아갈 수 없는 데 어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으며 영원히 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니 그냥 성큼 성큼 걸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원래는 그렇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매일 그들을 찾아 오는 하나님 앞으로 마음껏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것이 안 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야 되는데 오히려 숨게 됩니다.주님 여기 있어요라고 소리쳐야 되는데 혀가 움직이지 않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순간(죄를 범하는 순간) ‘이라는 힘이 작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마음(양심)은 달려가는데 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을() 머리가 알게 됩니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의 실제 의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은 더 하나님께로 멀어져만 갔습니다. 단지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경험한 한 민족만이 피의 제사를 드리며 나아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제사조차도 원치 않았고 하나님을 잊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다시 만들기 위해(구원)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아들은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만 믿기만 하면 죄로 인해 다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 올 때까지 복음을 붙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7절은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하고 진실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여 예수가 하나님임을 선포합니다.

 

다윗의 열쇠는 무슨 의미입니까? 다윗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완전한 인간으로 왔음을 알려줍니다. 열쇠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와서 구원을 여는 유일한 이라는 뜻입니다(14:6).

 

7절의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의미는 세상이 제시하는 다른 구원관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8절의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뜻도 믿음으로 열린 구원의 문만이 생명임을 강조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려운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만이 구원이라는(“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구원관을 고수하며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아시아의 중심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던 에베소처럼 경제적으로 잘 살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핀 서머나처럼 학문이 발달하여 큰 도서관을 짓고 많은 장서를 비치한 명성도 갖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아시아의 로마행정 수도로 알려진 버가모처럼 큰 권력도 있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많았고 매우 강한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본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적 큰 재해로 시민 전체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던 도시입니다(12절 참조).

 

이런 어려움을 겪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겠습니까? ‘지진이 나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교우들은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픈 상처를 간직한 성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들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주님을 붙들었기에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가슴 아픈 삶의 자리에서도 원망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우리에게도 기근과 지진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날 것을 마24:7에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징조는 마지막 때의 시작에 불과 합니다(24:8). 더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를 잘 견뎌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뭔가 잘 안되고 힘든 일이 나에게나 가족들에게 일어나도 입술에 불평과 원망을 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참 감사하게도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9절에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는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즉 불신자들이 와서 절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이삭의 우물을 빼앗던 아비멜렉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26:28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고난 때문에 생겨나는 원망을 인내로(10) 이겨내는 삶을 살 때 세상의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놀라운 일들이 생긴다는 믿음을 마지막으로 품어야 합니다.이런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