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믿음(5): 거짓을 단호히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2:18-29



세상 마지막 때 우리에게서 나타날 신앙의 유형들을 바라봅니다.오늘은 네 번째인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참 궁금합니다. 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서 칭찬을 받고 잘못을 책망 받는지 하나씩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모습은 책망이 앞서지 않고 늘 칭찬부터 하십니다. 그 다음 책망거리를 교회에 들려주고 계십니다. 19절을 보면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의 사업을 칭찬 받습니다.

 

사업이라는 것은 장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보여준 행위를 말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사역을 이끌어 갔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섬김은 어려운 핍박 속에 있는 성도들을 인내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칭찬이 많은 교회도 꾸중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은 남들로부터 칭찬 받는다고 책망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는 믿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6: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내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벧전5:8에 마귀는 배고파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두루 찾아 다닌다고 합니다. 교회를 힘들게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사람을 사탄이 찾는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라고 말할 것입니다.

 

말세 때 성도는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짓는 성도에 대하여 벌하는 징계의 도구로 믿는 우리들을 사용 하시는가? 물론 선지자를 보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회개를 요구합니다.

 

비록 그런 일은 하지만 죄 가운데 있는 북이스라엘을 직접 치는 징계의 막대기로 이방민족인 앗수르를 사용합니다. 남유다 역시 죄에 빠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바벨론이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을 역시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선을 너머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정죄하는 일과 징계의 범위 역시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남을 비판했던 성도 본인도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 성도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 주님과 같이 남을 용서하고 그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주님 오시는 마지막까지 품고 사랑하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18절에서 두아디아를 향해 말씀하는 주님을 보기 바랍니다.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쇠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며 마지막 심판과 연관이 됩니다.

 

벧후 3:12을 보면 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영원히 타는 유황불에 던져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20:10을 보기 바랍니다. 그곳에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이런 엄한 주님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의 행위를 배우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가장 악한 왕인 아합 왕의 아내로 권력을 잡고 백성들을 이방종교화 시킨 주역으로 북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되는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그러면 두아디라에서 이런 힘을 가지고 성도를 미혹할 만한 인물이 누구일까요? 이세벨과 같이 권력을 등에 업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무력화 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혼돈시키는 거짓 요소가 있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이미 길드라는 상인조합이 결성되어 강한 조직력과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기술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 숙련된 전문가 밑에서 배우는 기간이 필요하다 보니 상인조합은 나름대로 조합원들을 장악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두아디라는 주석과 동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돈이 되기 위해서는 이 원재료를 바로 팔거나 아니면 제조하여 전쟁에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어 팔아야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상인조합은 당시 로마 권력과 결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16:14에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의 자주장사 리디아를 보면 염색업이 발달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염색한 자색 옷은 고가품으로 귀족이나 권력가들이 구매한 것을 감안하면 로마가 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로마 제우스 신의 아들 아폴로를 섬기는 신전을 세웁니다. 이 도시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로마 신을 매개체로 하여 권력과 접촉점을 찾고 결탁하며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합원들 가운데는 믿든 자는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이 나타나 뭔가 가르쳤고 교회는 그것을 용인했다고 20절은 말합니다. 로마 황제 숭배도 아니고 신화 속의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 정도 이익을 위해 잠시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야 라는 해석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발견됩니다. 돈도 벌고 신앙도 지킬 수 있다는 이익과 편의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예를 들겠습니다(가을 북스타디 계획).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현상으로 나타나는 동성간의 사랑은 성경이 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데 기독교의 진리만이 절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종교가 신의 이름을 다르게 말하는 것뿐임으로 알라나 하나님은 같다.  

 

두아디라는 거짓을 수용합니다. 상인조합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은 여 선지자의 달콤한 거짓선동에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일제 때 신사참배를 '국가의례'라고 교회가 가르치며 대부분의 성도들이 따랐던 것과 동일한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조금 다른 거짓도 분별하고 바른 신앙을 택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한 교회에 유일하게 이곳에만 표현된 하나님 아들이신 주님이 경고하는 소리에 순종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