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과 믿음(2): 처음과 같은 믿음의 삶이 필요합니다  

2:1-7



앞으로 맞이할 종말에 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막13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시간이 진행 되는 과정을 말씀하시면서,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 질서가 파괴되고, 인간사회의 최고 갈등인 전쟁 등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영적 세계까지 혼돈 될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부터는 그런 세상 속에서 성도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 알아 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 소아시아에 교회가 일곱뿐이었겠습니까? 일곱 교회를 통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이 갖게될 믿음을 미리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들은 당시 소아시로 불리었던 지금의 터키지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내년에 NYBC 목사님들 몇 분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오게 될 지역입니다. 다녀와서 말씀을 드리면 더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먼저 보게 되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로 사도행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통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18:18-19) 그곳으로 갔고 함께 복음을 전하며 나중 3차 여행시(19:1)세워진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의 특별한 애정이 담긴 곳임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바울의 선교 사역 패턴은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가정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곳에 잠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떠나는 순례전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만은 좀 달랐습니다.

 

바울이 3년 정도(20:31) 머물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당시 에베소는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물품들의 교역으로 부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 이만 오천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원형 경기장을 만들어 자랑하고 하나님과 먼 자신들의 삶을 즐겼던 곳이기도 합니다.

 

에베소가 항구도시다 보니 사람들의 이동 또한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당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들어와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 예로 도시 가운데 남아있는 화려하고 웅장한 외형을 가진 도서관은 무려 만 오천 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지식인들이 교육의 중심도시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고대7대 불가사의에 해당되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 신전은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여사제들은 신전에서 성행위를 즐기던 그런 종교행위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향락에 젖어 있고, 세상 가치관을 몰두하고, 난잡한 종교행위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형편을 알고 바울은 이곳에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하게 됩니다. 먼저 항구를 지나가는 당시의 수많은 순례 전도자들을 재교육하는 사역을 합니다. 항구를 통해 밀려 들어오는 세상 학문에 지속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도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19:9-10) 긴 시간을 배려하며 제자들을 양육합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 역시 세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내를 가지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복음을 전하는(행위), 수고가 있는(2)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티카 사역에 모드 성도님들이 하루라도 참가해 줄 것을 권합니다.

 

한편 바울이 떠나고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깁니다(딤전1:3). 그리고 사도요한이 순교한 무덤 위에 기념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성경교사인 아볼로가 가르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훌륭한 부부가 섬기던 교회입니다. 앞서 섬기던 사람들의 본을 보며 선한 행위와 수고를 계속해서 이어져 갔습니다.

 

바로 이 지속적인 선한 행위와 수고와 섬김 있는 믿음이 우리 교회에도 절실합니다. 성도는 사랑도 받지만 이제는 내가 예배,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친교, 교육의 여러 분야에서 교회를 섬기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꾸지람보다(4-5) 칭찬이(2, 3, 6 ) 많은 것을 봅니다. 우리도 주님께 잘못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잘 한다는 말을 주님으로부터 더 듣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칭찬 받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2절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거짓 사도라 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6절에는 그들을 니골라 당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당시 영혼만 구원받으면 육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에 죄를 지어도 용서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영지주의 일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 나가는 믿음이 말세에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잘못된 것을 받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누리던 부와 연관 있습니다. 세상에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것을 쓰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남을 위하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의 향락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윤리적 도덕적으로 양심이 늘 문제가 됩니다.

 

향락을 즐기면서도 이것이 내 양심에 찔림이 없고 모두가 그것을 지향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바램을 가진 자들에게 종교가 그 답을 제공합니다. 힘든 세상 편하게 살고 죽어 누릴 것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거짓을 퍼뜨리는 이 생각은 말세의 잘못된 종교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에 자유를 선포해 주는 그런 교리가 자연스럽게 태어났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처음부터 들었던 복음의 진리에 금이 갑니다. 욕심이 진리 속으로 스며 들어와 타협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4절에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의 처음 사랑을 5절에는 처음 행위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 사랑은 변질되지 않고 복음 그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말세에 가져야 하는 믿음은 예수 믿고 따르며 행했던 모든 좋은 것들을 끝까지 지켜 행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