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부모(2): 자녀를 노하게 하지 않는 부모
엡 6:4
저는 사무실 창문에 넝쿨식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전에 흙에 키우던 때는 일년에 한번 새롭게 화분을 갈아주면 되었습니다.
지금은 물에 키워서 더 쉽게 물만 부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넝쿨이 자라 올라오면
지지대 정도만 받혀 주어도 잘 자라는 것을 봅니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만 자라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키우는 화초들은 잘 안 자라도 괜찮지만 자녀들은 다릅니다. 잘 키우려다 보면 간섭이 많아지고 당연히 소리가 높아집니다.
말을 잘 듣던 아이들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화도 낼 줄 알고 대항까지 합니다. 4절을 보면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뜻일까요? 일단
어색하게 들리긴 해도, 아이들일지라도 어른처럼 심하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아이들은 화가 났다가 금방 풀립니다. 잊어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노엽다는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공동번역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번역을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원인을 강조한 듯 “자녀의 마음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라고 번역을 합니다. 결국 감정을 건드리는 부모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아이들이 화가 나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가 “너 왜 이렇게 못해”라고 한 말에 아이는 상처가 됩니다. 크면서 모든 일에 나는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전하기를 싫어하고 학교에서도 사회에 나가서도 소극적 성격이 됩니다.
물론 한 번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의 말도 심한
경우 깊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상처를 주는 장본인이 아버지들처럼 들리게 합니다. 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공동성경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의미하는
‘어버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의
성경도 역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부모들”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부모 중 누가 상처를 주느냐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절은 자녀 상처의
전적인 원인 제공자가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도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자녀의 상처에 책임을 지고 문제를 풀고 회복시켜 줘야 할 책임자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상처를 회복시킬 것인가 입니다. 왜냐하면 아물지 않고 상처로 남아 있으면 지속적으로 아픈 곳을 파고들어
더 상처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상처를 주는 원인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게 즉각적인 차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결단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참다가 어느 날 분을 쏟아내는 날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아이들의 상처를 발견하면 푸는 것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 예배에 언제 어떻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진지하게 나누고 용서를 구하면 최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가족이 서로 용서를 구하는 훈련을 해 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상처는 너무 긴 시간이
가기 전에 털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들을 치유를
하고 사춘기를 맞아야 되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버지들에게 주신 권위입니다.
그런데 정말 깊은 내면의 상처는 아이들이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더 문제입니다. 이런
상처는 자라면서 자녀들의 성격과 인격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 부모는 이것까지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아이가 말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모가 먼저 알고 용서를 구하며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습니까?
잠잘 때 조용히 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조그마한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어릴지라도 부모가 기도하면 아이들은 잠을 자는 척합니다.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듣게 될 때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서 치유가 일어나고 나중이라도 용기를 내어 서로
나누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키우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외우게 하고 야단치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부모가
실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4절의 ‘양육’이란 단어를 ‘기른다”(공, 새, 현)로 번역합니다. 화초나 식물을 키우면서 안 자란다고 욕하고 저주합니까? 심지어는 메를 들어 때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듬어 주고 필요한 영양분을 더 공급합니다. 잡초가 나면 뽑아주기도 하고, 심지어 ‘잘 자라’라고 말도 걸기도 합니다.
가장 잘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처럼 자녀를 기르는 것입니다.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자신에게 하지 않듯이 자녀도 그렇게 키우면 됩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 할 것 중 하나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만든 프레임을 목에 걸어 주어 그대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책은 몇 권을 읽고,
세계여행은 어디 어디를 다녀야 하고, 성적은 이 정도 되어야 한다는 목표설정입니다.
더 대단한 부모는 학교까지 정해주며 이런 사람이 되라고 최종 꿈도 심어줍니다.
나무를 키운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나무를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욕심이 심하면 가지를 묶기도 하고 철사 같은 것으로 꼬기도 하고 심지어 뿌리도 자릅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만 자라도록 하기도 합니다. 나무는 그렇게 해서 원하는 대로 자랄 수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강압적인 힘에 못 이겨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나무가 말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너무 괴롭게 하지 마세요. 화가나요” 본문의 노하게 말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그린 꿈을 자녀들에게 주어서는 안됩니다. 자신들이
꿈을 그릴 수 있도록 도구만 제공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꿈을 어느 날 벗어 버리면 부모만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부모가 너를 위해 그렇게 투자하고 가르쳤는데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원망합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 재능과 성품을 살펴서 부모가 제안하는 프레임은 괜찮을까요? 사실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들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주님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습니다. 쓰시고자 하면 모세처럼
왕궁도 왕좌도 버리고 거친 광야에서 주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해야 하는 것은 자녀들의 주변을
둘러치는 세상의 가치관에 가두는 프레임을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걷어 내는 것입니다.
이 작업이 없으면 우리 자녀들은 성공만 바라보며 살고, 물질 만능주의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오직 최고만이 살아남는 경쟁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아픔에 대해 공감도 못하는 심장을
달고 살아가는 기계와도 같은 무의미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들의 귀한 자녀는 주 안에서 무한히 자라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영양분인 말씀을 하나님께로 공급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교훈과 훈계인 이 영양분을 시기 적절하게 골고루 공급하고
계시는지요? 가정의 달 오월을 맞아 부모가 평생 아이들의 마음 판에 새겨질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복된
오월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