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7): 주를 먼저 바라보기 원합니다 

8: 22-26

 

예수 시리즈 속에 사람들을 고치는 장면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참 특이한 방법으로 병을 고치는 모습을 봅니다. 벳세다라는 동네에 주님이 이르게 되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아옵니다(22). 주님이 손을 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데리고 온 사람들과는 반대로 눈 먼 사람의 손을 잡고 동네를 나갑니다(23). 주님이 병자를 고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는 분인데 여기서는 좀 다릅니다. 그 자리에서 병자를 고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자신이 없어 보인다는 오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또 고치신 후에도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26절에서 지시를 합니다. 이것도 주님이 두 번이나 안수한 후에야 고친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에 고치지 못한 것이 동네에 알려지게 될까 염려하는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이 병자를 고치면서 여하튼 많은 의문점을 남기는 본문입니다.  

 

게다가 침을 뱉고 안수하여 치유합니다. 유일하게 공동번역은 침을 바르고로 되어 있지만 사실 침을 뱉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침을 뱉는 행위는 인격모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침이 치유제로 사용 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주님의 치유 행동은 별 문제가 안 될 것 같습니다.

 

7:33에도 보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침을 뱉어 혀에 대는 모습을 봅니다. 둘 다 침을 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치유의 과정에서 주님이 의도한 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의 손을 붙잡고 동네로 나갔던 이유도 좀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고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던 사람이 누군가에 이끌려 가는 것은 그에게 희망을 주고 기대감을 심어 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행동은 치유가 우선이 아니라 이 사람의 심령에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를 데려왔지만 전작 그는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부터 풀어가 보기로 하지요? 첫 번 안수 후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라 나중에 그렇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들 보다 더 실망과 좌절을 맛본 사람일 것입니다.  

 

눈 멀기 전 활발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볼 수 없다고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이끌려 오긴 했지만 솔직히 주님께 간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소경이면서 고침을 받은 사람들과 이 사람을 한번 비교해 보면 당장 알 수 있습니다.

 

9:27-31에 두 소경이 나옵니다. 이들은 주님을 향해 따라오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눈을 만지며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매우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본인들이 직접 왔고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문의 소경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에게 이끌려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의욕도 없고 더 소극적입니다. 말도 할 줄 알면서도 본인이 직접 고쳐달라고 간청조차도 안 합니다. 18:35이후에도 여리고의 한 소경이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구걸하는 것을 집어 치우고서 달려와 치유를 받습니다. 살려는 의지가 구걸이라는 모습을 통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 실망가운데 있어 사는 법인 구걸조차도 모릅니다. 시간이 너무 짧아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내가 여보 이제 힘 좀 내세요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체 방구석에 앉아 술만 마시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려주어도 반응도 없었습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답답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이 맞을 수 있는 한 가지 정황이 더 본문에서 포착됩니다. 22절을 보면 이 사람을 데리고 오는데 사람들(they)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데 몇 사람이 필요할까요?

 

자신이 고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직접 물어라도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를 안내해 줄 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분명 몇 사람이 그를 데리고 주께 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고로 절망감 속에서 의지도 없는 사람을 거의 끌고 온 것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이 지나가면 다시 만날 수도 없을 텐데 이 기회뿐인데! 가족들이, 친구들이, 아내가, 교우들이, 목원들이 애타합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이끌고 온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라면 당장 고쳐주어야 할 텐데 주님의 행동은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주님은 전혀 다른 치유를 시작합니다. 혹시 못 고칠가 불안해서 도로 마을로 나간 것이 아니고 능력이 없어 두 번이나 안수한 것도 아닙니다. 손을 잡아 이끄시는 손길에 고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기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단단히 걸어 잠급니다. 주님은 시간을 끌기 위해 침을 뱉습니다. 만지십니다.

 

여러분이라면 눈 뜨면 누구를 가장 보고 싶습니까? 도대체 나에게 이렇게 하는 이 사람의 얼굴부터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분에게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볼 때 바로 당신이군요, 감사합니다.”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구원을 맛보게 한 분은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를 향해 주신 교회비전과는 무관하게 행동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앞의 주님을 먼저 보았다면 한 번에 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주님 아닌 다른 것을 먼저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25절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다시 안수하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무엇을 주목하여 보았을까요? 주님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우리도 주님이 우선이 안되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볼 수 없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먼저 보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