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6): 주님 앞에 자존심 좀 구겨도 됩니다 

7:24-30


 

말을 참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마음을 잘 이해해서 대신 말해주면 참 고맙기도 합니다. 머리에서 뭔가 잘 정리가 안될 때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주면 더 좋구요. 더구나 싫은 소리 남에게 잘 못할 경우 대신해서 시원하게 이야기 해 주면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은 참 말 잘하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녀는 두로 지방의 이방 여인입니다. 유대인이 이방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주님은 이곳에 제자들과 함께 오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앞 부분인 막 7:1-23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긴 정결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과 이런 논쟁으로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잘 모르는 두로에 와서 조금 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24절을 보면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12명의 제자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한 집에 거하는데 곧 알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알려질 것 아시면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다는 것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계획 가운데 그 땅을 찾아온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했다는 말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직접 한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생각이고 나중 베드로의 제자가 된 마가의 기록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로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이어지는 주님의 행적을 보면 더 확실합니다. 31절에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매라고 기록합니다. 두로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계속 이방인 지역들을 두루 돌아 다니며 전도할 계획을 갖고 먼저 이곳을 찾은 것입니다.

 

두로에서 한 집에 머문 것도 사실 막3:7-8에 보면,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 지라.” 이미 두로 지역 사람 중에는 병 고침을 받고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집일 것입니다.  

 

당연히 그 집 주인도 주님이 동네에 왔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를 25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입니다. 소문을 들었다는 말은 누군가 소문을 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가진 자들의 마음입니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헬라말을 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25). 부모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5:22에도 딸이 병들어 죽게 된 아버지(회당장 야이로)도 주님 발 앞에엎드렸습니다. 이 여인도 딸을 위해서 동일하게 주님 발 앞에엎드립니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지역이 달라도 간절한 도움을 요청하는 인간의 모습은 같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무릎 꿇을 사람은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조상들이 페니키아 제국을 이루었던 찬란한 역사를 가진 후손입니다. 헬라말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한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구기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더 세게 나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종차별적, 민족 우월주의적 발언을 하십니다. 27절에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위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않다고 하십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위해 좋은 일을 베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모욕적인 언사입니다. 제자들도 오늘 재수 더럽게 없는 한 이방 여자가 걸렸구나. 피곤해서 쉬러 오신 주님 잘못 건드려 당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 병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 올 때 보여주는 공통된 모습을 몇 주 동안 보아 왔습니다.

 

1장에서 나병환자는 사람들께 가까이 오는 것 저지 당할 것 알면서도 자존심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 꿇어 엎드립니다(1:40). 2장에서 중풍병자는 주님께 나오지만(3) 둘러싼 많은 무리로 접근조차 못합니다. 그때 친구들이 지붕을 뚫어 공중에 자신을 둥둥 달아 내려도 창피한 것 다 잊고 나아왔습니다.

 

5장의 혈루병 앓는 여인은 몸에서 피가 흘러 나옵니다. 사람들은 불결한 여인이라 소리칩니다. 그런 모멸감 무릅쓰고 나아가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섭니다. 그래서 길이 조금씩 나고 수치와 모욕을 참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기어서 나아갑니다(27). 주 앞에 올 때 자존심 상하는 것 넘어 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힘들어 하고 아플 때도 왜 나의 자존심을 내려 놓게 만들까요?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맞다는 것만 저는 알뿐입니다. 군에서 철조망을 넘는 방법 중 하나는 뛰어 넘는 것입니다. 힘도 없고 절단할 도구도 안 가져 올 경우는 주위를 살펴 철조망을 덮고 밟고 넘어갈 것을 찾게 합니다.

 

힘도 없고 주의에 아무 보조물도 없으면 결국 남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짝 엎드려 밑으로 기어 통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린 사람들을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더 심하게 대합니다. 침을 뱉아 눈에 바르며 인격과 감정 무시하고 자존심 뭉게 버립니다.

 

이유는 자존심보다 더 낮아질 때 장애물을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질 때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강한 나의 자아, 자존심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절대 예수를 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나를 막아서는 가장 큰 장애물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내가 주인 된 나의 자아가 내 자존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장애물이 십자가이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 속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한테 상한 마음 때문에 예수 믿기를 거부하십니까? 교회를 비난하던 사람인데 이제 어떻게 마음 바꾸고 어떻게 예수 믿어! 자존심 때문에 구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매일 내 자아와 내 자존심을 내려 놓는 방법은 주 앞에 나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됨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날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