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4): 끝까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5:21-43

 


장례식에 갈 때마다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실제 살아나신 분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8번 정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엘리야, 엘리사, 예수님, 바울, 배드로). 특히 예수님은 세 번 정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사는 이야기가 성경에 많다는 것은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도 12 살의 어린 딸이 생명이 위태롭다는 안타까운 소리로 시작합니다(23). 너무나 속상합니다. 아마도 그 사람에게는 외동 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이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이 속한 유대 공동체가 신성모독으로 거리를 두고 배척하고 있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보다 나이도 더 어린 사람의 발 아래 엎드리기 까지 합니다(22).

 

사랑하는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감소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해도 좋습니다. 어린 사람에게 어른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죽음보다 생명을 갈구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것을 다 버려도 생명만을 살리고 싶은 인간 내면의 갈급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처럼 생명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 본능이라고 말하지만 충분한 답은 못 됩니다. 오히려 창조주의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애착을 가지도록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이 23절에서 들려옵니다. 그런데 그의 소리에 한 가지 특이한 것이 발견됩니다. 그는 주님께 치유하는 방법까지 제시합니다. “와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어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손을 얹어 병이 나아 살게 해 주세요”(, , ) 라는 뜻입니다. 언듯 보기에는 무례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자신이 보았거나 들었던 치유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회당장은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위해 손을 얹으면 산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시험에 부딪힙니다. 주님이 집까지 가는 길에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시간은 계속 지체되고 속은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들의 병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딸은 곧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급하니 길을 비키라고 말씀도 안 하십니다.

 

게다가 혈루병 앓는 여인이 중간에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35).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조금만 서둘렀다면 자신의 딸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살았을 때 병도 고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어떻게 살릴 수 있겠습니가?

 

포기하려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이 나섭니다. 그가 실망하려는 순간을 잘 포착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36). 이미 구원 얻은 상도들도 믿고 난 뒤 더 시험이 많아 계속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더 이상 갈 수 있겠습니까?

 

희망이 사라지고 가능성은 제로인데 어떻게 소망이 살아납니까? 우리도 믿음이 있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잘 되던 것이 막판에 안 될 때, 있던 믿음도 사라집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처음부터 회당장의 믿음은 확실해 보이는데 주님은 병을 고치는 것을 미적거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곳의 예를 보면,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옵니다(8:5-13). 그때 그는 말로만 해도 낫겠다고 믿음으로 요청할 때 주님은 집으로 가지도 않고 병자를 고친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딸의 병 고침에 대한 회당장의 믿음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딸아 나을지어다라고 말씀만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회당장의 강한 믿음의 요청이 없었기에 안 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을까요? 여기서 심각한 문제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믿음조차도 포기할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라질 것 같은 그의 믿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구원 얻은 성도를 끝까지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기 바랍니다.

 

다른 은혜가 더해지는데 믿음 있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주위에 믿음을 가진 분들과 교회가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주님을 지체하게 만들어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혈루병 여인입니다. 오히려 이 여인이 회당장의 믿음을 견고히 만들어 줍니다.

 

회당장이 믿음을 포기하려고 할 때 그 여인의 믿음이 도전을 준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죽을 힘을 다해 다가 갔습니다. 옷자락은 그녀의 마지막 힘이 다한 곳입니다. 주님께 마지막까지 나아가는 그녀의 믿음이 회당장에게 도전이 된 것입니다.

 

처음 주님 발 앞에 엎드릴 때 딸을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가자 끝까지. 주님이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시니 다시 여기서부터, 믿음으로 가자고 하는 곳까지, 주님과 동행하자.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포기하면 안되지. 나는 이분을 믿고 끝까지 가야 해.” 결국 그는 끝까지 갑니다.

 

우리도 동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고 살아 왔는데 어느 날 나에게 불신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이 헛것이 될까? 라는 생각으로 걱정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실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회당장은 한번 더 집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주님이 죽은 소녀를 보고 잠잔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그들은 소녀가 살아나는 현장에서 다 내보내집니다. 이들을 분류하면 처음부터 믿음이 없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들입니다. 쫓겨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믿음을 갖고 출발한 사람들은 또 시험이 있어도 반드시 가야 할 자리, 다시 사는 현장까지 주님이 은혜로 이끌고 가십니다. 이 복을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