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3): 본능 아닌 믿음을 원하십니다 

4:35-41

 


바다에서 배를 타다 풍랑을 만나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배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심한 파도로 배가 몹시 흔들리고 겁이 났던 경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몇 살인지 생각 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무섭고 힘들었던 배 멀미의 기분은 알고 있습니다.

 

풍랑을 만나본 경험이 없어도 오늘 본문을 보면 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큰 파도가 일어 배가 엄청나게 움직이는데 예수님이 잠을 자는 모습입니다. 38절을 보면 배 앞이 아닌 뒷부분인 고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보다는 훨씬 뒤가 더 파도에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역에 지쳐 있으면 곤하게 자고 있을까, 이해는 갑니다. 그러나 37절을 보면 물이 배에 차게 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옷이 젖어 잠에서 깰 정도인데 자고 있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것은 힘든 상황에서 주님을 깨웠는데 제자들에게 믿음 없다고 꾸지람을 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주님 따른 지 얼마 안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앞에 귀신을 쫓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들을 마가는 기록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시간은 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믿음 없음을 꾸짖을 만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40절의 어찌 믿음이 없느냐대신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번역을 합니다(, , ).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을 믿음으로 깨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위험에 처하자 자신들의 선생님을 인간의 본능으로 깨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여기서 선생님입니다. 그들은 위기에서 주님을 불렀지만 인간의 본능일 뿐입니다. 본능은 믿음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주님 깨우는 것은 믿음 아닙니까? 죽을 것 같아도 주님 방해하지 않는 것이 믿음 있는 모습입니까? 한 마디도 않고 꾹 참아야만 합니까?

                                                         

목요일 저녁 8시에 북스터디를 하는 분들이 고난과 고통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들이 세상에는 있는데 그 한 가지가 이슬람적 이해입니다. 알라가 주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일절 토를 달지 말고 한 마디도 반응하지 말고 받아 들이라는 숙명론적 고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힘들 때 부르지도 못하는 그런 신을 왜 믿습니까? 성경은 전혀 다릅니다. 시편에 엄청나게 나오는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50:15; 86:7)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배에 물이 차서 죽게 된 것은 진짜 고난이고 그 상황에는 주님을 깨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깨웠는데 주님은 엉뚱하게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도대체 환란으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어떤 믿음을 가져야 주님의 마음에 흡족할까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정답 보다는 답에 가까운 접근을 시도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선 오늘 사건의 40절의 결론을 보고 거꾸로 올라가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은 풍랑을 일으키는 바다조차도 잠잠케 할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제자들이 갖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믿음의 수준의 제자들에게는 너무 큰 기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수준의 믿음은 무엇이 될까요? 주님을 불러 깨우기만 하면 능력은 둘째치고 이 위험에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그런 수준의 믿음조차도 없었다는 것을 주님이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이 바로 38절의 원망입니다.

 

제자들의 소리에 원망스런 분위기가 세워 나온다는 것은 이런 상황이 일어난 원인이 자신들이 아니라 상대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오늘 이 사건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35절을 보면, 가르치기를 마치고 호수 다른 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말씀이기에 어쩔 수 없이 건너갑니다.

 

그때 날씨에 대해 불안해하며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호수에 배를 타고 가르칠 만큼 낮에 평온한 온도가 지속되면(4:1) 밤이면(35) 갑작스레 높은 산에서 호수로 바람이 불어 심한 풍랑이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풍랑을 만나니 주님을 깨울 때 짜증도 나고 원망도 섞인 소리가 나왔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강가에서 자란 아이도 알 수 있는 날씨 하나 못 맞추는 주님에 대해 무슨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풍랑을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은커녕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을 다시 보면 도와 주소서라는 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갑자기 폭풍이 일자 원망스런 마음과 함께 본능으로 주님을 깨웁니다. 믿음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짚 푸라기를 잡는 반사작용 같은 것입니다. 잡아 보았자 짚푸라기는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때 만약,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사오니 도와 주소서라고 부르짖었다면 그것은 분명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도와 주소서라는 외침에는 도와줄 상대가 분명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 상대의 능력 또한 믿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오늘 본문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음 없다고 말한 제자들의 모습을 40절에서 보기 바랍니다. 떨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믿음 없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무서워하는 것을 믿음 없음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다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따집니다.

 

죽게 될 정도의 파도가 치는데 안 무서워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안 무서워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 이들이 사도라 불릴 때(4;19; 5:29) 전혀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죽을 것 같은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떨지 말기 바랍니다. 내 속에서 조그마한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기도응답은 멀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본문에서 주님이 어떤 믿음을 갖기를 바랬는지는 확실히 모르는 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그러나 인생살이에서 환란을 만날 때 본능으로 원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와 달라고 부르짖기 바랍니다. 어떤 환난일지라도 주님이 나를 도와 줄 분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소망을 갖기 바랍니다. 죽을 것 같지만 떨지 말기 바랍니다. 도움을 주실 능력의 주님이 내 안에(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하나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