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 죄를 용서하시는 분 

2:3-7

 


한국은 설 분위기이지만 이곳은 학기 시작으로 분주합니다. 앞으로 가보지 않은 시간들을 걸어가게 될 텐데 주님을 더 붙잡으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예수를 바라볼 때 능력과 은혜가 공급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마가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살피며 도전 받는 시간을 계속 가지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중풍병자가 네 사람에 의해 주님께 옵니다(3).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주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지붕에 올라가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게 됩니다(4). 아픈 자가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열정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동일한 마음과 행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아직 전도를 한번도 못한 분이 계십니까? 앞으로 전도 대상을 찾을 때 아픔을 가진 분들을 먼저 찾아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전도가 더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 힘들어 하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시골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일요일 보다는 주일이란 말을 사용하고 비가 와서 모내기를 하는 시기에도 그것을 멈추고 빨간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귀신들린 사람들이 교회에 가기만 하면 제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믿지 않는 분들이 정신적으로 괴로워하고 질병으로 아파하는 분들을 보면 주님께로 데려 가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복음을 뿌리는 수고가 있는 성도로 회복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바라보는 오늘날의 성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 회복을 위해 교회 소그룹이 활성화 되어야 합니다. 주위에서 힘들어 하는 분을 찾으면 목원들이 함께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 분 스스로가 올 수 없기에 먼저 초대하고 음식을 나누는 수고가 있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네 가정이 달려들어 한 분을 메고라도 오는 수고가 있는 목장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이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네 사람이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확실히 해 둘 것은 한 사람의 죄 사함은 그 사람의 믿음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병자의 믿음은 간곳없고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이 작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란 그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데려온 네 사람의 믿음도 엄청난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 그를 데려 가기만 하면 병을 고친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병자는 어떨까요? 그곳까지 왔지만 더 갈 수 없을 때 그만 했으니 돌아가지요. 여기까지가 나의 운명인 것 같습니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소리를 내지 않고 그 역시 네 명의 행동에 자신도 믿음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예만 성경은 보여줍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대표인 모세 한 사람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이 아닙니다. 양의 피를 바른 모든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전도하다 감옥에 갇힌 밤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게 됩니다(16:23-34).

 

이때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살하려 할 때 바울이 제지합니다. 간수는 당황하며 어찌하면 자신이 구원을 얼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30). 이때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고 말합니다. 여기도 간 수 한 사람만 믿어 그 집 전체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32절에 바울이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합니다(32). 그리고 그 사람과 온 가족이 각각 세례를 받습니다(33). 그리고 34절에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했다고 전합니다. 복음을 들은 각 개인이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구원은 우스개 소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 덕에 천국 가지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리 한 가족일지라도 믿는 그 사람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 된 모습을 바라보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 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이 그의 죄를 사하시고 난 뒤 육신의 병을 치유하는 모습이 따로 개별적이면서 순차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진정 치유 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하는 장면입니다.

 

육신의 병이 아닌 죄 문제가 더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아픈 분들이 언듯 듣기에는 서운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까짓 영혼의 문제가 무엇이 대수며 죄는 또 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 병만 낫는다면 나는 지옥이라도 가겠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육신이 병을 갖고 사는 인생보다 더 깁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더 심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지옥이 갈만한 곳이면 주님이 이 땅에 왜 왔겠습니까? 우리를 지옥에 보내고 싶었다면 왜 예수님이 그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지옥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죄 용서함 없이 아무리 육신의 병을 고쳐도 죽음과 사망이라는 영원한 멸망의 길을 가야 하는 엄청난 심판이 모든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이 치유에 앞서 죄에 관심을 가진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에는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와 같이 영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는 복이 그들에게도 임하는 소망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픈 분을 보면, 치유를 위해서도 당연히 기도하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죄까지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선포하여, 불신자들은 예수 믿게 만들고, 이미 믿는 분은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