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4): 주를 따르는 자  

1:35-42; 5:1-11; 1:16-18(4:18-20)

 

방학 동안 계신 곳에서 다들 복된 새해를 맞이하신 줄 믿습니다. 지난 주 눈으로 좀 더 늦어지긴 했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직임명이 있는 날입니다. 제직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주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열심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마가/마태는 주님이 그들을 부를 때 갈릴리 호숫가에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매우 간단히 말합니다. 물론 주님이 부르는데 누가 거부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부를 때 당장 따라 나서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간단한데 우리에게는 너무 복잡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사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6:66-67). 우리가 잘 아는 부자 청년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마태/마가가 기록하고 있지 않는 더 상세한 내용을 눅 5:1-11은 말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을 전하기 전에 따로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1). 아마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무리들 가운데 주님이 기다리는 그들이 늦었거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 1:35-42절에서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암시해 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의 이야기보다 먼저 주님과 이들이 만난 적이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세례요한이(35)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자신의 두 제자에게(안드레/요한) 알려 줍니다(36).

 

그 소리를 들은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주님을 따라갑니다(37). 뒤 따라오며 주님의 거처를 묻는(38)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39). 그 중에 하나인 안드레가(40) 자신의 형인 시몬에게 달려가 메시야를 찾았다고 하며(41) 주님께 데려옵니다(42). 이 만남이 사실 주님과의 첫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시몬을 보시고 이름을 게바(베드로)로 바꾸어 주십니다(42). 그 때 이들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고 일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주님이 그곳에 왔고 많은 무리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5:1-11) 주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전에 누군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응시했다는 단어로 누가는 그려냅니다(2).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 응시한 그들은 배 두 척을 가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2).

 

이때 주님은 두 배 중 시몬의 배에 올라 무리들을 가르치십니다(3). 말씀을 다 마친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해서 아무것도 못 잡았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다고 말합니다(5). 그런데 그 날 엄청난 체험을 합니다.

                                                                                  

그물이 찢기고(6)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를 잡은 후 도움을 요청합니다(7).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도 전혀 없었던 일입니다. 이것을 경험한 베드로는 즉각 예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8).

 

우리에게도 동일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호숫가에서 평생 산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만 가지고 주님이 하는 말을 믿지 못했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지금까지 믿음이 생기기 않았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호기심 때문에 주님께 가서 주님을 바라보았던 시간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을 때 우리를 향한 은혜로 말미암아 생겨납니다. 베드로의 경우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말씀에 순종할 때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고기를 잡히게 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꼭 기적으로만 나타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의 일을 일으키십니다.

 

자아로 단단해진 심령을 비집고 이 은혜가 흘러 들어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생각하는 주님은 선생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됩니다왜냐하면 그 순간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생겨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 역시 당시에 살던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처럼 로마로부터 해방을 주는 메시야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에 하루 가서 주님의 집과 먹을 것 하나 변변치 못한 삶은 보고 실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렇게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이날 이후 다시는 그를 만날 일도 없을 것이며 그 집에 안 갈 것이다.” 주님은 해방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군사를 모아 로마를 몰아낼 생각은 없고 힘없고 연약한 병자들과 천한 사람들만 찾아 다닙니다.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주님은 초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일터인 호숫가에 주님이 와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도 이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생계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 그리고 다른 중요한 일들을 제쳐두고 이들을 찾아 주님이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한 것으로 주님을 외면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이 찾아 오셔서 부르실 때 응하며 따라가는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심은 여러분을 교회로 오게 한 이유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터넷을 보고 온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허락하고 사람들을 붙여주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나오게 한 것은 주님의 찾으심입니다. 나를 찾아온 주님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을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부르십니다. 그 부름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5:11).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 직업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주님을 따른다고 다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해주는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산다고 주님께 나오지 못했던 삶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예는, 주를 위해 살 것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는 예배 교육 전도/선교 교육 구제/봉사 친교 등의 섬김의 자리에서 내 일로 바쁘다고 벗어나려고만 하고,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어떤 직업을 가졌던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지금 주를 위한 희생이 있다고 느껴지면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손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 따르는 것이 가장 손해가 없는 길이고, 무엇보다 만족함으로 감당해 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직을 포함한 모두가 즐거움으로 주님 따르는 학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