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주일: 영적 무기로 무장하고 출발하자  

2: 18-20; 6: 16-18; 58:1-9

 

2019년 코넬 봄 학기가 이번 주에 시작됩니다. 강건함 속에 주님이 동행하는 학기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무기가 필요합니다. 다들 에베소서의 영적 무장을 많이 알고 있는데 오늘은 좀 다른 것을 성도님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실 새로운 무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생소한 이유는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미리 읽으신 분들은 금식이라는 것을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금식이 성도들에게 있어 엄청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태도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금식하면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 하시는데 사실은 성도가 활용해야 할 무기입니다. 금식이 왜 그렇게 좋은 무기인지 궁금해 지기 시작합니다.

 

오늘 분문을 보시면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 위해 주님께 나아옵니다. 마가는 2(1)에서부터 3(6)까지 5가지 논쟁을 다룹니다. 주님과 세 번째 다툼을 위해 나온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는데 왜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느냐고 비난합니다(18).

                                                                                                   

주님의 광야 40일 시험에서 있었던 금식을 언급했던 마태와 누가와는 달리 마가는(1:12-13) 오히려 사람들과 논쟁거리에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는 시간에 금식보다 오히려 함께 즐기는 것이 낫다고 주님의 말씀을 마가는 생생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19).

 

더 나아가 성도가 금식 할 때가 언제인지를 그는 정확히 말해 줍니다. 주님이 더 이상 지상에 머물지 않는 때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빼앗긴 후라는 것입니다(20). 더 나아가 마가의 금식에 대한 관심은 논쟁을 하로 온 사람들의 내면 속에 있는 뭔가를 들추어 내는 것입니다.

 

논쟁하러 나온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하며 금욕적인 삶을 사는 세례 요한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마가는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 못지 않은 도덕적인 삶을 자랑하며 교만으로 가득찬 유대 종교 지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금식에 대한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금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마태가 6:18-20에서 강조를 했다면 마가는 오늘 본문에서 왜 금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식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누구나 한끼만 안 먹어도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금식할 때 모든 것을 다 이룰 것 같았던 내 속의 교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보다 금욕적인 삶을 자랑하며 나아왔던 사람들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 심지어 주님조차도 낮추어 보는 독이 교만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만은 영적 피조물이 하나님께 대한 적대행위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보다 먼저 천사들이 저지른 범죄의 시발점이 교만임을 사14:12-14에서 알려줍니다. 그런데 금식은 우리들 속에 있는 이 교만을 녹여 줍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금식이 얼마나 감사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다음 질문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주어지는 반면 왜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구원이 허락되지 않을까요? 천사는 죄를 범하였지만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이 육체를 가진다는 것은 교만이라는 범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가를 알게 하는 감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가 갖지 못하는 육체를 소유합니다. 죄를 범한 잘못도 알지만 가슴이 뛰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육체를 가졌기에 죄를 범할 때 인간만이 가지는 두려움을 가지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졌기에 질병이 오고 고통을 맛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육신을 주셨지만 교만을 버릴 수 있는 장치도 알려 주십니다(58). 금식입니다. 금식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바라보며 교만으로부터 스스로 내려 오게 만들어 줍니다(58:4). 그렇다고 해서 금식이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은 아님은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금식으로 구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교만은 죄이기에 복을 막습니다. 그러나 금식은 그 교만을 굴복시킵니다. 결국 금식은 죄의 사슬을 끊고 복을 가져다 주는 도구입니다. 금식을 통해 스스로 높아진 교만을 버릴 때 우리는 낮아지는 겸손을 맛보게 됩니다. 3:34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합니다.

 

벧전 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주님이 높이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가 높아지려는 교만은 내쫓김을 당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to be like God) 교만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합니다. 그 결과는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하나님, 진실, , 공의, 정의, 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나를 스스로 낮추어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무기가 바로 금식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기를 원하십니다(58:8-9). 다른 것으로도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겠지만 무엇보다 교만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금식을 무기로 삼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