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  

1:2-3

 


새로운 한 해 2019년을 맞이 했습니다. 모두다 새해가 되면 한 해의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코넬한인교회 새해 표어는 소그룹이 활성화 되는 해로 정했습니다(10:24-25). 왜냐하면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이 전파 되는데 우리교회 소그룹이 사용 되기 위함입니다.

 

소그룹은 교회로 보면 목장도 되지만 가족도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교회도 소그룹입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쓰임받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주의 길을 준비한 한 사람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세례요한입니다. 개역개정과 현대인의 성경은 그를 사자로, 공동번역은 일꾼, 새번역은 심부름꾼으로, 영어성경들은 messenger로 번역합니다. 다양한 번역들을 볼 때 상당한 목적으로 그를 사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나타납니다.

 

3절에서처럼 그를 외치는 자의 소리로 보면 그는 주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가 맞습니다. 그러나 주인 보다 앞서 가서 길을 준비하는 자라고 한다면 그는 일꾼이 맞을 것입니다. 4절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보면 그는 하나님의 대사로 보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에게 소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내가 앞서 가는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한다는 소명감 없이는 우리 성도는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2019년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은 이 소명감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이제 소명감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소명감을 가진 분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습니다. 홀로 있어도 좋습니다. 오직 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는 한 곳을 정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소명감을 가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지라도 십자가가 방향이고 주님 닮는 것이 목표가 되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바쁘고 다른 스케줄로 인해 목원들이 없는 목장모임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목장지기 한 가정만이라도 모임을 가져 보기 바랍니다. 새벽기도를 할 때 늘 함께 해 주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떤 날은 혼자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날도 동일하게 혼자서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소리내어 전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주의 길을 곧게하는(2) 책임도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원래 길은 곧아야 합니다. 그런데 곧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길을 만들다 보니 굽어집니다. 그럴지라도 길은 곧게 만들어지듯이 소그룹 모임이 이유들로 취소되지 않고 열심을 다해 모이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구별된 삶을 삽니다. 그는 성읍에 살지도 않고 광야를 택합니다. 옷도 낙타 털옷과 가죽 띠를 둘러메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외모와 삶의 방식을 택함으로 구별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조금 조심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늘 석청과 메뚜기만 먹고 살았을까요?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꿀도 나는 철이 있습니다. 풀도 없는 광야에 메뚜기는 살 수 있습니까? 바람에 지나가는 메뚜기는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그가 늘 메두기와 석청만 먹고 산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의 금욕적인 그의 삶을 표현하는 마가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부르심에 맞는 삶을 추구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것들입니다. 그는 제사장 아들입니다(1:5).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되어 좋은 옷 입고 제사에서 나오는 고기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안락한 삶을 제쳐두고 광야의 삶을 택한 이유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를 이어 제사장은 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제사장의 의무와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죽음을 면치 못할 죄입니다. 이것조차도 무시한 결정을 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것이 있기에 그는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말하는 구별의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에서 남 안 먹는 석청과 메뚜기 먹고, 약대 털옷 입고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에 내가 선택한 것으로 인해 세상과 구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에게서 배우는 것은 선하고 진리되신 주님을 먼저 선택하였기에 세상의 악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먼저 선택하면 탐욕을 버리고 거짓을 멀리하고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술, 담배, 음란과 도박, 마약, 거짓, 사치, 낭비, 속임과 같은 악에서 자연스레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별되게 사는 삶 자체를 우리는 우상화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하며 금욕주의적 공동체가 유대 광야에 생겨났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 공동체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포도주와 독한 술을 마시지 않는 나실인의 삶을 살기위해서(1:15) 스스로 구별된 삶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당시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대적인 요구에 부합하며 자신의 구별된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인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4:5) 말한 대로 그의 외모도 엘리야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자신의 뒤에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만 서게 됩니다. 주님보다 앞서 왔지만 뒤에 오는 주님을 높여 드립니다. 나이도, 가문도, 인기도 더욱 주님보다 컸지만 스스로 주님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자들은 주님 앞서 행동하지만 주님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11:11)라는 칭찬을 더하십니다. 2019년도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을 가리지 않도록 겸손하게 섬기며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