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4): 나의 하나님 되심을 감사 

140:1-13

 


지난 주 추수감사절에 많은 성도들이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감사제목을 기록해 보려고 시도했던 분들은 쉽지 않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감사는 추수감사절에만 하는 것 아닙니다. 2018년이 가기 전에 더 많은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묵상하며 감사의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6절에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고백은 하늘에 계셔서 멀게만 느껴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까이 그것도 내 속에 거하는 하나님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거하기 때문입니다. 삼상 16:13절을 보면, 선지자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순간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사용합니다. 다윗에게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1-5절을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문제들을 처리해 주시는 능력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인, 포악한 자들이(1)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다투기 위해 매일 모여듭니다(2).

 

이것을 여러분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웃는 얼굴로 대하는 동료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마음으로 악을 꾀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다윗의 경험을 통해 3절에서 더 상세하게 나열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아이들도 말 때문에 친구들로 왕따를 당합니다. 어른들도 악한 말 때문에 점점 우울해지다 더 심한 말 때문에 심지어는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냥 말이지만 그 혀 속에 악인들은 독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 보다 악한 사람들이 더 발견됩니다. 내 가는 길 앞에 누군가 나도 모르게 함정을 파고 올무와 줄을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5). 이것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겠습니까? 나의 능력 밖입니다. 그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전지전능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내 곁에 있어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것을 막아주십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건지심(1), 보전하심(1, 4)과 지키심(4)으로 악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인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왔던 것입니다.

 

이쯤 하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나는 그런 도움 하나님께 받아 본적이 없는데요? 나는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이 건져주지도 않았고 더 힘들게만 몰고 간다는 생각이 드는 분이 혹시 여기 계시는지요? 왜 다윗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과 나와의 차이점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1, 4, 6절을 보면 나를 건지시고, 지키시고,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주부로 살아가는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들이 다윗보다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보다 더 많은 요청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부르짖어도 별 볼일 없던데요라고 말할 분 계신가요? 이것 역시 다윗과 차이점입니다. 간구를 넘어 탄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탄식이 없는 간구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간구를 마친 다윗의 탄식은 8-11절에서 시작됩니다.

 

탄식은 가장 먼저 나의 심령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토로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와서 억울함을 말하던가요? 엉엉 울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하며 자신의 상한 감정을 털어 놓습니다. 바로 이것이 탄식입니다. 나의 분함과 억울함을 아시고 바르게 판단하시고 벌 주시는 하나님께 토로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조건 달려와 자기의 억울함을 털어놓습니다. 이때 자기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올바르게 판단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12절에서 찬양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그런데 간혹 어찌 그리스도인은 남들을 그렇게 저주할 수 있습니까?” 라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기도를 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적 행동에 앞서 생각과 마음을 살피고 심판하는 분입니다. 성도는 내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을 바르게 판단할 것을 믿고 그냥 나의 마음을 털어놓는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8절의 주어가 여호와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상한 심령을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솔직히 아뢰는 것입니다. 그 상한 나의 감정에는 바르지 못한 판단과 남을 정죄하는 것도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심판자가 아니라 탄식자가 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기에 그런 것을 초월해서 판단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다윗은 13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탄식은 상한 마음을 토로하고 사람들을 향해 저주로 끝내는 주문이 아닙니다. 도와 달라는 간절함, 토로하는 상한 심령이 올려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백의 찬양,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가 올려 집니다. 탄식은 성도의 무기입니다.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용해야 합니다.

 

상한 마음이 있습니까? 아픈 심정 그대로를 아뢰기 바랍니다. 나를 도와 달라고 부르짖기 바랍니다. 물러가야 할 악한 것들이 나의 앞에 있습니까?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하나님이 물러가게 하시고, 그들의 입술을 막아주시고, 심판자가 되심을 믿고 찬양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공급하는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