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5): 치유 공동체
행 3:1-10
성령은 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를 좋아합니다. 배움, 교제, 예배, 나눔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치유라는 새로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 의술도 병원시설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형편이라 치유가 더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많은 병들이 정복되지 않고 있다면 기적은 일어나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치유되는 장면입니다. 보기에는 사도들에 의해 한 사람이 낫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사건은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사도들 역시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깊은 상처가 치유
되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치유 기적은 초대교회가 성령체험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역하던 몇 년 전 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왔을 때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귀신 하나 못 쫓아 낸다는 조롱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놀림 당했던 기억이
늘 제자들을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될 것 같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큰
상처로 남아있었습니다.
나중 믿음이 없다(막9:19)는 소리와 함께 기도 외에 이런 유가 없다(막9:29) 는 말씀을 주님은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후 아직 제자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려 성전으로 가는 그날에 베드로와
함께하는 요한에게 뭔가를 성령은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요14:26).
요한은
전에 특별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막9:38-40). 제자가
아닌데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한 사람을 보고서 돌아와 그것을 금하였다고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성령이 지금 역사하는 것을 알고
옆에 베드로를 격려 했을 것입니다.
4절을 보기 바랍니다. 두 제자가 동시에 그 사람을 주목하고 동시에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6절에 요한은 빠지고 베드로만 손을 그 사람에게 내밀게 됩니다. 요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늘 남들보다 더 잘해서 칭찬받기를 원했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요한은
나이가 어려서 늘 주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었고 으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 충만한
요한은 베드로에게 치유의 첫 기적을 어쩌면 양보하는 겸손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성령으로 치유된 요한의 성숙된 모습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편 성령님은 베드로에게는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는
약속이 그를 사로 잡았고 손을 내밀게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 한 사람의 치유의 기적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입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첫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무능력’이라는 마음의 상처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놀라운 체험을 다 함께(수제자에서 어린 제자)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행5:12).
그렇다면 성령님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역사하고 계실까요? 병 고치는 장면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에게 자신들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의도이고
더 나아가 베드로 속에 계신 예수를 보게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도 그렇게 우선적으로 말해야 하고 또 그런 태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전혀 그런 것과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돈을 얻을까 해서 쳐다 보았다고 5절에서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대로 성령은
역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 사람의 믿음과 간절함과는 무관하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런 일도 생기네요.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하십니다. 이
사건을 보고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에게 매우 유익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 가운데 아픈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없는 초신자라도 성령의 권능은 나타납니다. 게다가 믿음이 아직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설명해 줄 수 없는 어린 자녀들이 아프거나 불편한 처지에 있을 때에도 성령님은 스스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는 늘 치유에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에 학습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치유하는 자가 주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아픈
사람이 믿음이 좀 부족해도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도 그 사람과 같이 믿음의 상태였을까요? 아닙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미 성령 충만한 두 사도가 그를 주목합니다. 사도들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 마음을 가질 때까지 사도들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은 약속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서 믿음의 행동을 하게 만드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으로 다른 성도의 연약함을 바라볼 때 성령이 우리를 통하여 치유하기를
원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앞으로
목장이나 어떤 모임에 아픈 분이 있으면 반드시 그 모임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 권능이 있음을 믿고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여 치유 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