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5): 나눔 공동체
행 2:44-47; 4:32-35
초대교회가 기도를 통해 계속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혁명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2: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4:32-35절에 좀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 소유를
포기하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삶이 시작 되었습니다. 세상 철학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재산의 공동 소유화와 필요에 따라 나누는 이상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교회는 실제로 그 삶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성령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은, 왜 성령은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나누어주게 만들었을까요? 일단 시대적 상황 때문에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당시 유대인들도 악착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그들에게 어려운 삶이 찾아
왔습니다. 특별히 세금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복음서에 세리가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마태도 세리였습니다. 게다가
누가복음의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로부터 놀라운 선포를 듣습니다. 자신이 남들에게서 착취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민지 백성들이
세금으로 상당한 착취를 당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전쟁으로 인해 남편이나 자식들이 많이
죽어 삶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과부가 성전에 와서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기록합니다(21:1-4). 그녀 자신의 생활비 전부가 두 렙돈(팔
만원 노임에 천 원) 정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아도
그들의 핍절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성령은 성도들을 감동시켜 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물건들을 서로 통용합니다. 부족한 물품들을 서로 나누어
함께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팔아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입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소유에 있어 사회정의가 실천되는 모습을 역사에서 보여줍니다.
초대교회가
이룬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자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계층간의 계급을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소외된
자들도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 예가 바로 6:1에서 구제사업에서 소외된 과부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성찬이 계층간의 계급의식을 없애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성찬에 종이 주인보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주인과 종은 존재하지만 주 안에서 형제 자매로 하나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2:46절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그리고 4:32절에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넘어 세상은 이런 이상적 공동체를 제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교회만이 자신들의 가난은 물론 남들의
아픔을 보고 나누는 공동체를 역사 속에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성령의 능력입니다. 좀 쌩뚱맞긴 하지만 예수님이나 당시 초대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의 일이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것이
맞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의무화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 대속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의 삶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전부를 드리는 새로운 물질관을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예가 4:36-37에서 바나바입니다. 그도 역시 자신의
밭을 팔아 전부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누는 삶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하게 산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경제적 정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지금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것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은
‘자기의 의’로 하지만 교회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행 21:35)는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의 가르침이 주님 오시기까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향한
책임을(accountability) 사랑으로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향해 서로가 책임지는 나눔은 하나님의 속성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지난 주 교회학교 학부모 회의에서 어린이 행사가 소개 되었습니다.
카운티 내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음식 나누는 일에 어린이들이 조인할 것입니다.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선물 나눔 행사도 가질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큰 도전이
있다면 내 것을 내 것이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4:32). 이 나눔의 비결을 4:33에서 하나 더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
예수의 부활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부활과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나누는 삶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부활신앙은 이 땅에서 수고한 것을 쌓아두는 것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만들어 줍니다. 부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 죽음 다음에 오는 선물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 나라에서 주님으로부터 귀한 상을 누리는 복이 성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내 모든 것을 드릴지라도 아깝지 않고 더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개인과 교회가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자발적인 나눔이 있는 공동체로 역사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믿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나눔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눔이 더 풍성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