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3): 예배 공동체 

2:42-47



성령충만이 임할 때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됨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았습니다. 42절을 보면 먼저 교회는 배움을 통해 성도의 정체성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제를 통해 주 안에서 서로 아름다운 사귐이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친밀한 교제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떡을 떼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개역개정의 떡을 떼다빵을 나누는것으로 공동번역은 말합니다. 그 행위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는 의미에서 새번역은 빵을 떼며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은 그 행위가 바로 오늘날 성찬임을 나타내기 위해 성찬을 나누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행위는 그냥 식사하는 것과는 구별 됩니다. 42절을 보면 교제를 나누고 기도하는 사이에 빵을 떼는 행위가 들어가 예배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46절을 참조하면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고 모일 때마다 주님이 행한 성만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개인 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모인 성도들은 처음에는 주로 성전 뜰에 모여 제자들의 설교를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자신의 집을 공개하고 그곳에서 빵을 떼는 성찬을 갖는 예배 형태를 보여줍니다.

 

46절을 보면 성찬을 마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모습이 따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기뻤다고 표현합니다. 정말 기뻤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성전 뜰에서 모임은 그냥 모여 말씀만 듣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날마다(daily) 집집마다 돌아가면서(from house to house: NASB, KJB) 이어지는 성찬과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베드로의 설교 이후 삼 천명이나 성도가 늘어났는데(41)이들이 한 집에 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가장 큰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은 120명 정도가 모일 수 있는 마가의 다락방 정도입니다. 삼천 명을 위해 매일 자기 집을 오픈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을 하루 안에 다 마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성찬과 음식을 먹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각자의 집에 돌아가면서 매일 모이는 방식뿐입니다. 소그룹으로(목장별로) 나누어서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초대교회는 가정 중심의 소그룹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현대교회가 소그룹을 개발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미 초대교회는 소그룹 단위로 모이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각 가정에 모일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을 대접하였습니다. 46절을 보면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동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도 매일 돌아가면서 자신의 집을 오픈하고 식사를 준비해서 먹는 일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매일 자신의 집을 오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돌아가면서 모여도 매일 모였기 때문에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의 순서가 돌아왔을 것입니다. 음식도 한 집에서 다 준비하기는 힘들 수 있기에 각자 집에서 미리 준비해서 가져와서 나눠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도 목장모임 해 보셔서 알지만 쉬운 일이던가요? 그래서 목장지기님이 많이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경우도 있고, 각 가정들이 음식을 만들어 오기도 하고, 음식을 먹고 모이는 목장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올 가을에는 모두가 자신의 집을 오픈해서 모임을 가져보는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궁금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힘든데 그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43절을 보며 각 사람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안 하면 병들고 저주 받을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일까요?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맛볼 때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입니다(성경적 전통: 시내 산 앞의 이스라엘).

 

이 두려움은 동시에 성도에게 또 다른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46절에서 발견되는 기쁨입니다. 대부분 영어성경은 ‘gladness’ 로 번역하는데 exceeding joy, 즐거움입니다. 넘쳐나는 내적 충만함입니다. 일을 해도 지치지 않게 하는 샘솟는 즐거움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의 선물이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는 목장모임이나 어떤 교회 사역에 함께 하실 때 기쁨으로 수고를 이겨내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두 가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지치지 않습니다. 다음은 감정의 굴곡을 타지 않게 됩니다. 늘 바뀌는 우리의 기분과 감정을 주님께 고정될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넉넉히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이 있습니다. 46절에 그들의 마음이 순전한 마음’(: 진실한 마음, :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순수한 마음이 없습니까? 마음은 순수한데 육신이 안 따라 줄 뿐입니까?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마음이 육체와 일치된 상태를 순수, 순진, 진실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마음)은 반드시 행동과 일치 되어야 합니다. 나의 순수한 생각대로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는 순수하고 순전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KJV 번역은 생각과 행동이 하나되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Singleness of heart, 하나된 마음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마음이 하나되면 됩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모든 성도가 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매주 집을 오픈해서 목장 모임을 갖는다. 목장지기는 돌아가면서 하기에 다음에는 나다.

 

이런 생각들은 현대교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형이 되었던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성령이 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한 마음이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복된 가을 학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